2022년 08월 15일
1주일 판결 3건의 담합
사법농단 이후, 새로 취임하신 대법원장께서는 사법농단의 근본적인 원인이 법원행정처를 통해, 그리고 특히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통해 대법원장이 판사들을 통제한 것에 있다고 보아 결단을 내리셨다. 그 결단이란 법원행정처에서 판사가 수행하던 행정업무를 모두 판사가 아닌 공무원 또는 외부 인사가 수행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
위 제도 변화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부분은 종래 서울 초임지에서 법원행정처 요직을 거쳐 부장판사, 고법부장판사, 법원장, (운이 따라야 하겠지만) 종국적으로는 대법관으로 이어지는 법원 내 엘리트 코스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일한 승진이 없어지고(부장판사는 어지간하면 다 되니까), 좋은 평가를 받아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뒤 요직을 두루 거치는 경로도 사라져 버렸으므로, 많은 판사들이 열심히 할 동기를 잃어버렸다.
이에 더불어 법조일원화 시행 이후 5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판사로 임관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어쨌든 변호사로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봉급을 포기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판사가 된 경우가 많으므로, 로펌에 있을 때처럼 자신을 혹사하며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여러 변화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가 바로 각급 지방법원 배석판사들끼리 1주일에 판결을 3건만 쓰기로 하는 일종의 '담합'이다.판결문을 쓰는 게 판사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므로 1주일에 3건씩만 판결선고를 하기로 정한 것이다. 대략 1달에 12개의 판결을 선고하게 되는 셈인데, 당연히 1달에 법원 각 재판부에 접수되는 사건의 수는 24개(주심이 2명이므로)를 뛰어넘으니, 사건이 밀릴 수밖에.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도, 특히 2020년부터 사건 밀리는 현상이 심각해졌고 올해 초부터는 확실히 더 심해졌다.
통상 변론이 종결되면(그러니까 당사자들이 주장을 할 기회를 다 부여받았으면) 그로부터 4주~6주 안에 판결 선고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수행했던 사건 중에 울산 모 재판부는 변론종결 이후 4달 뒤를 판결선고일로 잡더니, 선고기일 3주 전에 갑자기 선고를 취소하고 강제조정결정을 내렸다. 당사자들이 모두 이를 거부하자 다시 판결선고기일을 잡았는데, 당사자들이 모두 거부한 날로부터 다시 4달 뒤였다. 결과적으로 변론종결되고 판결선고되기까지 9달 정도 걸린 것이다.
올해 초, 서울 중앙/동/남/북/서 중에 한 곳에서 진행된 사건에서 피고 소송대리인으로 답변서를 제출했다. 법리적으로는 조금 고민할 부분이 있으나 사실관계는 이미 확정되어 있어 심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사건이었다. 우리가 답변서를 내자 상대가 기일지정신청을 두 번이나 했는데, 거의 4달 이상이 지난 현재 아직도 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순서대로 기일 잡을 테니 기다리라는 것일 텐데, 아예 기일조차 안 잡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소장 내고 1년 뒤에야 첫 기일이 잡히는 경우도 다수 있다고 들었다.
이것이 사법농단의 재발을 막겠다며 시행한 제도 변화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다.
당연히 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법조인들이 법원을 성토하기 시작했지만, 여태까지 눈에 보이는 개선책은 나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판사가 1주일에 판결 선고할 건수를 정해놓는다는게 정말 웃기다고 생각한다. 뭐 워라벨, 내가 이 돈 받으면서 이렇게 내 몸 갈아넣으려고 굳이 로펌 때려치고 판사 된 줄 아냐, 이런 반박이 나오겠지만 판사 봉급을 로펌 변호사 월급이랑 같은 선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9급 공무원이 한달에 180 받으니까 나도 1주일에 민원 3개만 처리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다만 열심히 하더라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구조가 된 상황에서 소명의식만으로 몸을 갈아넣어 판결문을 쓰라고 할 수는 없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은 그런 동물이 아니다.
1주일 3건 판결선고 담합이 언제쯤 메이저 언론사에서 보도하려나 항상 궁금했는데,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면에도 기사로 실었고, 사설, 칼럼, 후속기사 등으로 여러 번 크게 보도했다.
그 결과, 법원에서도 판결 지연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책을 모색할지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고, 예측되기로는 조선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만큼 뭔가 조치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사법농단을 구조적으로 막겠다며 취한 조치가 일으킨 '당연한' 현상에 대하여도,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사에서 보도한 뒤에야 구체적인 '조치'가 나오는 게 '당연'한 것인지에 대하여도 '어대'께서 숙고해 보셨는지 의문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상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셨는지?
어쨌든 뭔가 실효성 있는 방안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by | 2022/08/15 22:01 | major - law | 트랙백 | 덧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