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11인 공저.
오랜만에 포스팅합니다. 도서 포스팅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관련된 책은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녀석입니다. 국내에서 70만 부나 팔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책이 왜 그렇게 많이 팔렸는지를 비롯하여 책의 논의가 어떠한지,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논하는 형식으로 쓴 책입니다. 올해 1월 정도에 출간되었고, 11명의 저자가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부분을 나누어서 적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집필에 참여한 11인은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공통됩니다.
다만, 11인의 저자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라 각 저자들이 쓴 부분끼리 긴밀한 연결성은 없고, 상호 대립되는 입장이 들어 있기도 하며, 저자의 역량에 따라 너무 과격한 주장을 하거나, 혹은 너무 난해하거나, 혹은 내용이 떨어지거나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좀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 솔직히 11명의 저자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장정일 씨 정도만 이름을 들어봤었는데요. 이글루에서 블로그 운영하시는 '노정태' 씨도 저자에 포함되어 있는 점은 눈에 띠더군요.
저는 올해 초에 잠시 인턴으로 한 연구원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그 연구소에서는 작년에 샌델을 직접 불러서, 경희대와 공동으로 강연회를 개최했었습다. 그래서 연구원에서 샌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요. 저는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없고, 그의 책이 이렇게 많이 팔린 것은 내용이 정말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버드 명강의'라는 타이틀과 그럴 듯한 설명,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시의적절한 제목에 힘입은 바가 너무도 크다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인턴과 대화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지요. 솔직히 하버드 타이틀의 힘이 결코 작지 않다고. 그러니까 옆에 있던 다른 인턴이 아니라고, 샌델은 정말 뛰어난 학자이고 강의를 정말 잘 한다고, 그래서 책이 잘 팔린 거라고 열변을 토하려고 하시더라구요.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싸움을 하기 싫어서 그냥 넘어갔지만(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인턴이 워낙 내가 싫어하는 유형이었는지라 말을 섞기가 싫었지만) 그건 단연코 개소리, 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단언컨대 이 책은 하버드 마케팅과 적절한 제목, 그리고 타이밍이 맞으면서 큰 성공을 거둔 성격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까놓고 말해보지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산 70만의 독자들 중에서 책을 1/3이라도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반은 넘을까요? 단언컨대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저 70만의 1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샌델이 정말 뛰어난 강사이며, 그의 강의를 유튜브나 아이튠스 U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저 위에 적어놓은 인턴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까고 있는 소리입니다. 저 책을 산 사람들이 샌델의 강의를 자막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구요? 그런 사람들이 미쳤다고 번역본을 삽니까? 원서를 사고 말지요. 물론 EBS에서 그의 강의 전편을 모두 번역해 방영하긴 했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일 뿐 주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방송 3사도 아니고 EBS면 아무래도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라는 거창한 제목과 '하버드 최고의 명강의'라는 타이틀에 낚여서 책을 산 후에 몇 장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 어딘가에 던져두고 말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영문판에 비해, 번역이 그리 매끄럽게 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을 갖고 저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통쾌했던 구절이 바로 다음 구절이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페이지마다 잔뜩 검은 칠을 해놓거나, 백지를 제본해 놓고 저 제목을 붙였어도, 거뜬히 50만 부를 팔아치웠을 거라는 예감마저 드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속이 시원한 말인가요.
책이 왜 이렇게 많이 팔렸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하고, 책의 내용을 한 번 공격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샌델은 미국에서 정말 유망한 정치철학자로서, 이른바 '공동체주의'로 불리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비록 본인은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롤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의론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 설파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가 드는 방법이 책에서 그렇게 반복되는 '딜레마' 상황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의 기관사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 명과, 비상 철로에 있는 한 명 가운데 한쪽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정의인가?
이 상황에서 샌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섯 명 대신에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사례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라며 다음 사례를 들지요.
이번에는 비상 철로가 없고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다섯 명의 인부를 향해 돌진하는 상황이다. 지금 당신은 전차를 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로 위에 있는 다리의 난간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으며, 당신 옆에는 어떤 뚱뚱한 남자가 함께 서 있다. 만약 이 사람이 떨어져 전차의 진행을 가로막는다면 다섯 명의 인부를 살릴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사람을 조금만 밀어도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다. 이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샌델은 이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두 상황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묻지요. 그는 저 두 상황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한다면 저 두 상황에서의 선택은 달라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의 주장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리주의자라면 두 경우 모두에서 5명을 구하기 위해 1명을 죽게 할 것이며, 이성주의자(칸트)라면 5명과 1명 모두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동일하기 때문에 1명을 5명 대신 죽일 수 없다(즉, 5명이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점을 지적한 후에,샌델은 이 두 입장이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맞지 않는다며 이 두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공격합니다.
'원초적 입장'과 '차등의 원칙'으로 유명한 롤스의 자유주의적 입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롤스가 주장하는 바는, 사회의 기본적 가치, 즉 자유와 기회, 소득과 부, 인간적 존엄성 등은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하며, 이러한 가치의 불평등한 배분은 그것이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특정한 정책의 선택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를 모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가려져 있는 상태, 즉 원초상태(original position)에서 합의되는 일련의 법칙이 곧 사회 정의의 원칙으로 사회협동체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사회 정의의 기본 원리로 ‘기본적 자유 평등의 원리’라는 정의의 제1원리를 도출해냅니다. 원초적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무지의 베일'로 가려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현실적인 사회의 격차가 벌어져 있는 상태이지요. 그리고 이미 불평등한 분배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롤스는 정의의 제2원리로 ‘차등 조정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이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그리고 기회균등의 조건 아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공직과 지위에 결부되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분배는 가장 취약한 계급에게 많은 것을 분배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롤스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데요, 이를 바꾸어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고, 불평등한 제도는 사회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 모든 절차가 공개되어 있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샌델은 이러한 롤스의 자유주의적 입장은 결국 어떠한 것이 정의인지 결정짓지 않은 채 내버려둘 뿐이고, 이는 결국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입장을 따라 사회를 분열하게 만든다고 공격합니다. 단순히 '자유'와 '절차'에만 주목하였을 뿐, 어떠한 실체적 정의를 채워 넣는 부분에서 실패했다는 말인데요. 샌델은 그 예로 낙태와 동성애를 꺼냅니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쟁점은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너무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소재입니다. 특히 낙태 문제의 경우 특정 인물의 이념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가령, 미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할 때에 인선의 절대적인 기준은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Roe case, 이를 다시 한 번 지지한 Casey case를 지지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레이건-아버지 부시-아들 부시로 이어지는 시절 미국 보수주의 세력은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는 인물을 대법관으로 인선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낙태와 관련된 판결이 나올 때마다 미국 사회는 낙태 찬성과 낙태 반대로 분열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샌델은 이와 같은 낙태 문제와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며, 공허한 자유주의로는 사회의 분열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의 입장을 요약하면 이는 일종의 '공동체주의'로서, 샌델은 사회의 어떠한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이며 법은 이러한 것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절차에만 주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어떠한 실체적 정의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공동선은 어떠한 지역이나 민족, 단체, 국가,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라 하며, 이를 파악하는 것의 하나의 예로 그가 드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입니다. 어떠한 텔로스(telos) 그러니까 어떠한 제도의 목적을 알아내고 파악한다면 어떠한 것이 공동선으로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샌델의 이야기를 요약했으니, 이제 이걸 신나게 깔 차례입니다. 샌델은 저와 같은 딜레마를 소개하면서 의도적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1. 저 두 개의 사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위에 든 사례에서, 첫번째 경우에 나는 기관사로서, 반드시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강제로 처해져 있지요. 즉, 나에게는 어떠한 결정권이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나는 어떠한 결정을 절대로 회피할 수 없습니다. 차로를 변경한다면 한 명이 죽고, 변경하지 않는다면 다섯 명이 죽으며, 나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경우에 나는 반드시 어떠한 결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다섯 명과 한 명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희생할 것을 결정해야만 하나요? 왜 나에게 결정권이 강제되나요? 나는 단순히 저 사건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요. 즉, 저러한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할 범위의 일이 아닙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 사회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일의 결정권을 누가, 어떻게 가지며, 이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는 정치철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샌델은 그러한 부분은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에게 결정권이 있으니 당신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고 가정하지요. 도대체 왜, 어떠한 근거로, 저런 상황에서 나에게 결정권이 강제되는 것인가요? 나는 어떠한 이유로 뚱뚱한 한 명의 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할지, 다른 다섯 명을 희생할지는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가 나에게 결정권을 위탁했나요? 이를 설명하지 않는 한 샌델의 저 딜레마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결정권이 강제되어 있는 저와 같은 상황은 일반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제로 가능하다면 일종의 전제정의 군주만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2. 샌델은 롤스가 이른바 '원초적 입장'에서 실제의 사회 문제를 도외시하고 현실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입장을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롤스는 그와 같은 원초적 입장이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분배 원칙으로 이른바 '차등의 원칙'이라는 것을 내세우나, 샌델은 이러한 것으로는 부족하며 결국 롤스는 절차적인 자유와 정의만을 이야기할 뿐 실체적인 정의를 꺼낼 수 없다고 말하지요. 그 말은 그대로 샌델에게 부메랑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동선'인 실체적 정의, 시대와 민족, 국가를 초월한 공동선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요?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떠한 제도의 목적(telos)를 고려하면 이를 찾을 수 있으며, 결국 개인이 공동체에 동화하고 논의함으로써 개인의 정의, 공동체의 정의를 찾을 수 있다고 치지요. 그러나 어떠한 제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이를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저 책에서 실제로 예로 든 것인데, 가령 동성애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샌델은 결혼이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서로의 사랑을 독점할 것을 서약하는 제도이지 후손을 전파하는 목적의 제도가 아니며, 따라서 이러한 telos를 고려했을 때 동성애가 금지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꽤나 매력적인 설론이지요? 겉보기에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샌델의 이야기처럼 개인 간의 사랑의 독점을 서약하는 것이 결혼이라면 왜 국가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가요? 왜 국가는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독점하는 제도에 온갖 편의와 혜택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미국 좌파 진영에서는 국가의 공인을 받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모순이며,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가 예로 든 제도의 목적이 각자가 서 있는 입장에 따라 판이하게 파악될 수 있다는 실제 사례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공동체는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국가와 민족, 지역, 나이, 계급 등으로 분절되고 다양한 공동체가 얼마든지 존재하지요. 샌델이 이야기하는 보편적 공동선, 그가 그 스스로를 다른 공동체주의자와는 자신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게 만드는 '보편적 공동선' (universal common good)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요?
샌델이 차려 놓은 밥상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파고들 틈을 찾으면 얼마든지 치명타를 입힐 만한 틈들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틈을 제대로 메우지 않은 한은, 그가 이야기하는 논의들은 언제든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그럴듯해 보이기만 하는 것 뿐입니다. 그는 적어도 어떠한 '결정권'을 어떻게 갖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가 그렇게 딜레마 상황을 학생들에게 밀어붙일 것이라면! 그리고 그가 '정치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도대체 왜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이를 결정해야 하는가요?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을 지으며,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요? 실제로 저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면 기관사는 자기 혼자서 결정할까요, 아니면 정해진 매뉴얼의 규정을 떠올릴까요? 그러한 매뉴얼의 규정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그는 분명 뛰어난 강사이기 때문에 강의 중에는 이러한 틈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말빨'로 감춘 틈은 책에서는 드러날 수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저자 중 어떤 이들은 샌델의 저런 논의를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의 그리스 철학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이라는 것을 보이면 그 취약점이 드러날 것이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롤스의 자유주의 정의론에 빈 공간이 있다는 걸을 증명한 것으로는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실제로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국은 일종의 '근본주의' 세력이 실체적 정의를 외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샌델의 논의에는 몇 가지 중요한 논제들이 빠져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지요.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통쾌했던 부분을 인용하고 글을 맺으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처음에, (다섯 명을 죽일지 한 명을 죽일지 결정하라는) 저 사례를 놓고 '어느 쪽이 정의냐?'고 묻는 사람의 정신 상태와 지적 취약을 의심했다. 그래서 이 책을 자신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놓고 읽기를 벼르고 있는 친구에게 세 가지 사례를 들려준 뒤 똑같이 물었다. 그러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건 비극이라고 해야지 정의가 아니다."